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한 22세 (문단 편집) === [[루트비히 4세]]와의 충돌 === 요한 22세가 선출되기에 앞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놓고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4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1세]] 간에 경쟁이 벌어졌다. 요한 22세는 당초 중립을 지켰으나 1323년에 루트비히 4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면서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다소 과격한 주장으로 인하여 구엘프(교황파)와 기벨린(황제파) 간에 다툼이 일어나고 [[프란치스코회]] 영성파가 루트비히 4세에게 종교적인 도움을 주자 칙서 《Quorumdam exigi》를 공표해 이들을 단죄하였다. 루트비히 4세는 교황권에 대한 교리 논쟁에 있어서 파도바의 마르실리우스와 [[오컴의 윌리엄]]에게 자문을 받았다. 루트비히 4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해 로마에 입성한 다음 1328년 피에트로 라이날두치를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대립교황)|니콜라오 5세]]로 내세웠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악수였다. 구엘프가 로마에서 수적으로 우세였기 때문에 루트비히 4세가 로마를 떠나자마자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가 체포되어 질서가 다시 회복되었다.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는 1330년 교황 요한 22세에게 항복을 선언하였다. 요한 22세는 대립교황 니콜라오 5세를 처벌하지 않고 아비뇽 교황궁의 방을 내주어 여생을 조용히 지내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오컴의 윌리엄은 파문하였다. 요한 22세 사후, 루트비히 4세는 1338년 렌제의 제국회의에서 "제후들의 다수결로 선출된 로마왕은 교황의 대관(戴冠) 없이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는 원칙을 수립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